< 거짓말의 젠가 >

_ 니문

 

거짓말을 하는 작업이 있다 . 그러나 그 거짓말은 늑대가 나타났다고 떠드는 양치기의 그것과는 다르다 . 양치기 소년은 늑대가 마을 주위에 있다는 진실을 알고 소리친다 . 늑대가 나타났다고 . 그러나 작가 박승희는 이처럼 진실을 주물러서 말을 짓지 않는다 . 이때 거짓말은 허술하다 . 비유컨대 있을 법한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, 산골 마을에서 고래가 나타났다고 외치고 , 해안가에서 사자가 나타났다고 외친다 .

작업의 서사가 가진 위태로움은 마치 젠가 (Jenga) 게임 같다고나 하겠다 . 54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진 탑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게임은 , 참여자가 돌아가며 한 조각씩 빼내다가 탑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진다 . 박승희는 거짓말로 젠가를 한다 . 하지만 이때 꾸며낸 말들은 견실하지 않다 . 시작부터 무리하게 맨 아랫단의 나무 조각을 빼내고 그걸 다시 조심스럽게 맨 위에 세워놓는다 . 빼낸 조각은 넓은 면이 아래로 향하게 올려놓는 게 아니라 좁은 면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세워놓는다 . 탑을 위태롭게 하는 거짓말의 이름은 < 광물사회학 > 이며 , 처음 빼낸 한 조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. “태초에 광물이 있었다 . ”

이 문장은 박승희가 제작한 < 광물사회학 > 이라는 책의 맨 첫 번째 문장이다 . 이 책에 따르면 , 광물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이며 , 점차 군집 생활을 하고 계급을 만들어 낸다 . 책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이 허무맹랑한 서사를 설명하기 위한 흑백 도판과 유채색의 회화가 제작되기에 이른다 . 거짓말에 살이 붙어간다는 건 , 탑에 몇 개의 블록이 조금 더 위태롭게 올라섰다는 걸 의미한다 . 당연하게도 나무 탑은 조금 휘청거리는데 , 그럼에도 끊임없이 위태로운 구조물이 세워진다 .

이 흔들리는 탑 앞에서 서서 박승희는 색면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, 작업으로 치자면 < 움직임 연구 > 다 . 작가는 이 작업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형태화시킨 것이라고 소개한다 . 이처럼 의식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. 액션 페인팅의 흩뿌리기 (dripping) 기법은 붓질이 의식화되기 전에 빠르게 물감을 떨구어 낸다 . 의식이 조직되는 속도를 이겨낼 때 우리는 무의식의 틈새와 마주칠 수 있다 . 그러나 앞서 썼듯이 , 박승희의 추상적인 색면에서는 그런 빠르기를 발견하기 어렵다 . 비교적 빠른 붓터치를 구사했다는 초기와 다르게 근작에서 발견되는 박승희의 움직임들은 대개 연체동물의 흐느적거림을 닮았다 . 붓질이 느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. 3~5 초 정도의 찰나 안에서 이 움직임의 모양새는 갖춰진다고 하니까 .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색면들이 여전히 찰나적인 형태로 보이지는 않는다 . 고르지 않고 제멋대로인 형태와 다르게 , 면적의 밀도는 균일하다 . 이유는 바로 위의 단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. 거짓말의 탑은 처음에 조금 흔들리지만 이내 간신히 버티고 있고 , 작가는 그 긴장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. 탑이 보여주는 미동의 긴장감은 정적인 형태이지만 그 옅은 움직임에는 무의식이 포착된다 .

그러므로 < 움직임 연구 > 에서 움직임이란 이 거짓말의 탑이 흔들거리는 움직임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. 그리고 색면은 그 둔한 긴장감이 자아내는 그림자를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. 이때 무의식적으로 발생한 색면들은 다시 의식적으로 선별된다 . 생각하고 그린 듯 하거나 , 너무 화면 안에서 균형을 잡는 색면이 만들어졌거나 , 생기가 없어 보이면 , 버린다 . 그러므로 선택된 무의식의 형태들만 남는다 . 굼뜬 위태로움의 자태를 가장 적확하게 묘사한 그림자만이 남는 것이다 . 아무래도 형태가 묘연한 면적의 자취가 불안정한 거짓말의 탑을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않겠는가 .

이번엔 영상으로 가보자 . 모든 영상물들은 시간의 담보를 필요로 한다 . 재생되는 동안 , 보는 이들은 보이는 것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조정할 수 없다 . 관람자의 시간을 잠시 담보하게 만드는 영상의 속성으로 보면 , 박승희의 영상 작업은 흔들리는 탑의 시간 경과를 바라보는 작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. 때문에 영상 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‘작가가 거짓말을 할 때의 태도 그 자체'처럼 읽힌다 . < 셀프 스포츠 > 라는 영상작업은 일 년에 한 번 이상 , 십 분씩 어떤 동작을 기록한다 . 그 동작이란 가령 다른 행동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등이다 . 나중에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. 그 경련마저 포착되는 10 분 동안에 관객이 머무르게 한다 .

이때 영상에 기록되는 동작은 < 움직임 연구 > 의 선택된 이미지처럼 주관적으로 선택되는데 , 주로 장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. 한 해의 동작은 작가가 위치하는 장소에 대한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. 핀란드에서는 주위에 있는 거대한 강이나 나무가 되는 연습을 , 미국 LA 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붓을 들고 있었다고 , 울산에서는 모텔과 점집들을 기록했다 . 하나같이 싱겁고 우스꽝스럽다 . 그렇게 10 분이 지나가고 그 지나간 시간 동안 거짓말의 탑은 그림자를 드리울 터이다 . 그걸 작가는 바라보고 있을 것이고 , 다시 렌즈 안에 그 보는 작가가 어리게 된다 .

그래서인지 < 셀프 스포츠 > 의 키워드 중 하나는 ‘자화상 self-portrait '이다 . 키워드 안에서 허풍을 대하는 작가의 얼굴이 담겨있다는 은유가 느껴진다 . 간단하기 짝이 없는 한 동작을 무리하게 연장시키는 난처한 모습은 무리한 말 짓기로 시작하여 간신히 허풍의 논리를 세워두는 것처럼 보인다 . 10 분 간 미소 짓겠다고 하고서는 나중에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은 몇 개의 나무토막을 빼내고 난 뒤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탑의 모습과 닮았다 . 영상에서 그이가 다행히 우스꽝스러움으로 버티는 모습은 또 다른 말 짓기를 계속하면서도 탑이 간신히 균형을 맞추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. 10 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어처구니없게 소비하며 긴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이의 태도는 3~5 초 정도의 짧은 시간의 붓질 안에서 반대되는 시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드는 < 움직임 연구 > 를 닮았다 . 강 앞에서 강이 되었다고 치며 손을 흐느적거리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, 나무인 척 서있으며 ,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은 짧음을 기어이 길게 바라보게 만든다 . 무료한 반복 안에서 10 분이란 참 느린 시간인 것이다 . 이러한 영상 안에서의 작가의 태도는 무의식적인 드로잉치고 참 노곤해보였던 색면을 그리는 사람의 태도 그 자체다 . 작가는 영상을 통해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의 움직임을 , 모호한 형태의 그림자를 그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.

가짜 서사를 자아내는 작업은 여럿 있다 . 이 작업들은 보통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엄숙하게 구현해내거나 실재 서사와 분간하기 어렵도록 구체화시키곤 한다 . 그러나 박승희가 구현하는 거짓 서사는 다르다 . 거짓말의 탑은 아주 허술하다 . 다른 거짓 서사들이 계속 속은 비어감에도 일견 견실해 보이는 거짓말을 쌓고 있을 때 , 그이의 탑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다 . 그러나 작가는 그 탑의 주위를 맴돈다 . 탑의 주위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기록하고 얼마나 부실한지를 탐구한다 . 그 탑의 움직임을 색면으로 , 그림자를 색면으로 옮겨놓는다 . 그리고 그 그림 그리는 자신의 태도를 다시 10 분 안에 담아둔다 . 지어낸 말 주변들은 허술하지만 , 그로부터 파생한 작업들은 탐구와 관찰의 결과물들이다 .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어떤 한 지점으로 엮어내기 힘든 박승희의 작업은 이렇게 하나로 엮인다 . 첫 번째 거짓말이 < 움직임 연구 > 나 < 셀프 스포츠 > 여기저기에 녹아들어 있다 . 가짜 서사 자체가 아니라 그 서사의 파편들을 다른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 , 이것이 묘미다 . 하나의 말 짓기 , 즉 설화나 미신 그리고 민담이 어떻게 전파되고 사람들을 움직이는지 관찰하는 민속학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. 때문에 이 거짓말의 젠가는 좀 더 오래 동안 버텨야만 한다 . 그래야 우리는 산 속에서 고래 ( 이야기 ) 를 , 물가에서 사자 ( 이야기 ) 를 볼 수 있다 .